교육교육일반
독립기념관, 10월의 독립운동가 ‘나운규 선생 선정’
정문교 기자  |  moongyo64@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09.30  10:17:47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나운규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나운규 선생을 10
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해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의 명동중학(明東中學)에서 수학했다.

1919년 회령에서 3ㆍ1운동에 참여하였고, 연해주로 건너가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활동했지만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북간도로 돌아왔다.

북간도로 돌아온 후 은사였던 박용운(朴龍雲)을 따라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로 이동하던 중 공부를 통해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를 듣고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온 나운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했지만일제가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면서 박용운 등과 함께 피체됐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3월 출소한 나운규는 예림회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됐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총희의 연」에서 가마꾼으로 데뷔하고, 「심청전」ㆍ「장한몽」ㆍ「농중조」 등의 영화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는다.

나운규는 1926년 10월 1일 「아리랑」을 제작해 6ㆍ10만세운동의 열기를 스크린으로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은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됐다.

   
                            아리랑 영화 제작진 단체사진

「아리랑」 이후 제작한 「풍운아」ㆍ「금붕어」 등이 흥행하면서 나운규는 조선영화계의 스타가 됐다.

1930년부터 음성영화인 ‘토오키(talkie)’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영화의 제작은 극도로 위축됐다.

1935년 나운규는 「아리랑」을 토오키 영화로 제작하기 시작했으나 동시녹음 실패와 재녹음 과정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고 폐병을 얻어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나운규는 원산만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1937년 토오키 영화 「오몽녀」를 제작하면서 재기에 성공했지만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활동한 결과 폐병이 악화돼 1937년 8월 9일 3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에서는 나운규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10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정문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송골1길 17 (203,원진휴먼빌)  |  대표전화 : 041-581-3007  |  팩스 : 041-581-3008  |  등록번호 : 충남 아 00231
간별 : 인터넷신문  |  등록일 : 2014. 6. 18  |  발행일 : 2014. 6. 24  |  발행인 : 정문교  |  편집인 : 권환철  |  청소년 보호 책임자 : 정문교
Copyright © 2024 뉴스앤충청.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