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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8월의 독립운동가 ‘채광묵ㆍ채규대 부자’ 선정
정문교 기자  |  moongyo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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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27  11: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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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채광묵의 묘와 묘비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채광묵ㆍ채규대 부자 의병장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채광묵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안창식(安昌植)과 함께 홍주의병에 참여했다.

1896년 1월 16일 홍주관아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金福漢)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채광묵은 남면 소모관에 임명돼 의병들 모집을 위해 파견됐으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만인 1월 17일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배반해 의병 지휘부 인사들이 차례로 구속돼 의병들은 해산했다.

홍주의병이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채광묵은 상경해송수만(宋秀晩)·김운락(金雲洛) 등과 도약소를 치리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적(賊)을 복수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국외로 도망한 적을 잡아오지 않는 외부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한규설을 탄핵했다.

1901년 8월에는 조정에서 내린 내부주사 직을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면서 강하게 거절했다.

1904년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김기우 등과 함께 반대 통문을 작성하고 일본공사를 만나 이를 질타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채광묵은 다음 해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에 추대했다.

의병들은 1906년 3월 15일 광시장터에서 봉기해 홍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관군의 저항으로 홍주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청양의 합천에서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 주요 인사들이 체포됐다.

민종식은 5월 9일 이용규(李容珪) 등과 함께 홍산군 지치동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우며 5월 20일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은 이후 여러 차례 일본경찰대를 물리쳤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2개 중대 규모 이상의 일본군을 파견해 홍주성을 공격했다.

참모장의 직을 받고 항전하던 채광묵은 이토 히루부미의 명령에 따라 파견된 2개 중대 규모 이상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수백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순국하고 말았다.

병든 몸을 끌고 의병에 참전한 부친을 모시고 항전하던 아들 채규대도 홍주성전투에서 부친과 함께 전사해 아버지는 충(忠)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 죽었다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채광묵 선생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고 1992년에는 채규대 선생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채광묵ㆍ채규대 부자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8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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