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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4월의 독립운동가 ‘안태국 선생’ 선정
정문교 기자  |  moongyo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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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3.31  14: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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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태국 선생 빈소(1920.04.11.)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신민회 일원으로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한 안태국 선생을 2022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안태국은 1877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평양으로 이주, 상회를 운영하며 기독교를 접하고 개화사상을 형성했다.

1907년 2월 안창호, 양기탁 등이 주축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로 신민회가 창립된 후 안창호의 권유로 9월경 창립회원으로 가입해 평안남도 지역 신민회를 이끄는 총감으로 임명됐다.

이후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산할 때까지 평안남도 총감뿐 아니라 서우학회 등에 가입해 계몽강연에 참여하고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 태극서관 주임, 대성학교 후원회장 격인 찬무원, 청년학우회 중앙총무 역할 등 신민회 활동에 적극 동참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거 후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계획했다.

평안남도 총감인 안태국은 1910년 12월 간부회의 참석 후 평양으로 돌아와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을 실행하던 중 일제가 ‘안명근 사건’을 구실로 신민회 간부를 체포하면서 안태국도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신민회의 존재를 알게 된 일제가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하고 전국의 신민회 인사 600~700명을 체포했다.

당시 옥중에 있던 안태국도 신민회 회원으로 지목돼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일제의 사건 날조를 폭로했으나 결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이어나가야 했다.

투옥 5년 만인 1915년에 감옥에서 풀려난 안태국은 고문으로 상한 몸을 추스른 후 1916년 가족들과 함께 중국 북간도 훈춘(琿春)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훈춘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동지들과 한민회를 결성하고 ‘한민회군’이라는 이름의 독립군을 창설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안창호의 초청을 받아 1920년 3월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러시아령 연해주 동포들과 독립운동 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했다.

임시정부 내 요직을 고사한 안태국은 동포들을 대동 단결시켜 독립운동 발전에 헌신할 뜻을 밝히고 특파원으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1920년 4월 서거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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